2007년 03월 06일
[펌]...조선을 말아먹은 최강 찌질리안 조광조...

조선이 건국되자 절개를 지킨다는 사람들이 두문동에 들어가거나 은거하며 성계와 도전이 트레이드도 생깠는데... 이런 사람 중에 길재라는 사람이 있었소... 여말선초 삼은 중에 야은 길재... 이 아저씨는 고려가 망하자 은거하며 학문에만 매진했소. 워낙에 유명한 학자라서 문하에 학생들이 적지 않았고... 이 사람 문하들이 훗날 김종직으로 대표되는 사림파로 성장... 훈구파와 대립하게 되었소.
훈구파는 조선을 건국한 공신세력(태종때 대규모로 개박살 나지만 몇몇은 살아남소.)과 관학파가 주류가 된 관료집단이었소. 대체로 개국세력답게 자주의식이 높았으며, 기술이나 천문등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부국강병에도 소홀하지 않았소... 대체로 조선초의 번영과 발전은 이런 관학파들의 노력이 힘입은 바가 컸소. 문제는 세월이 갈 수록 이 관학파가 훈구파란 이름으로 변질... 온갖 부패와 비리에 연관되고, 왕권에 대항하는 공룡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오.(부패와 비리문제는 이미 세종때 관료들만 해도 상당수준이었소.)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성종은 훈구파의 세력을 억누를 필요성을 느꼈소.(신하들이 자꾸 배놔라 감놔라 하니까...) 그래서 성종이 택한 세력은 산중에서 고고하게 글읽고 학문연구하는 선비들... 속칭 사림들이었소... 실제 이 친구들은 끊임없이 중앙정부 진출을 노렸소. 그러나 관학파의 압박은 굉장히 드셌소. 이 양반들도 어쩔 수 없는 사대부였기에 성종이 내미는 손을 당연히 덥썩 붙잡을 수 밖에 없었소. 그렇게 하나둘 중앙정부 진출을 하는데... 위기를 느낀 훈구파들이 정치테러를 감행해서 수차례 사화가 일어났소.
조광조는 폭군 연산군때도 살아남은 사림이었소. 이 시키를 더러 조선을 바꿨을 지 모르는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시바라마의 실상은 조선을 진짜 엿같이 바꿔버린 찌질리안이라오.
조광조를 더러 교과서나 학자들은 개혁가...라고 하오... 그러나 이 시바라마의 개혁안을 보면 절대 개혁가 소리를 들을만한 개새가 아니었소. 이 자슥은 골수 주자학 코드로 똘똘 뭉친 사림에 불과해서 그런 코드에 바탕을 둔 속칭 개혁안을 중종에게 들이 밀었소. 그런데 이 시키 개혁안은 백성을 위한다는 그런 것 보다 자기네 사림파를 위협하는 훈구파 조지기에 더 열성적이었소. 백성들에게 땅을 나눠주자는 것도 훈구파 땅(공신전) 뺏아서 나눠주자는 것으로... 위훈문제를 가장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훈구파 힘빼기에 열성을 기울였소.(멋 모르는 백성들이사 땅 준다니 좋아하오.) 그렇게 훈구파 땅은 다 뺏아서 훈구파 개안습 상황으로 만들려 했으면서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들은 지방에 지들 땅은 다 가지고 있었소.
거기에 이 시바라마가 가장 욕 쳐먹어야 할 것은 향약을 존내 주창한 것이었소. 향약은 예법이 어지러운 향촌 지방에서 규약을 정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교화하세...라는 아주 달콤한 내용이요. 그러나 그 꺼풀을 벗겨보면 그 실상은 사림들이 지방에서 파워를 가지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소. 원래 조선은 고려와 달리 모든 고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향리들을 억누르고, 지방에 행정권을 뻗어 중앙집권적 체계를 강화하였소. 그런데 이 중앙집권체제를 중후기 부터 개작살 수준으로 만든 것이 조광조 시바가 주창한 향약이요, 그 후대인 사림들이 시작한 향약이었소. 향약은 양반들이 향촌의 법규를 정하고 징벌할 수 있었기에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의 권력과 맞짱깔 수 있었소. 이미 유향소의 존재로 향약은 필요없는 것이나, 지방을 거점으로 한 사림들이 자기 세력을 공고하게 지키기 위해서 향약을 존내 밀어 붙었소. 물론 유교와 성리학적 가르침을 시골촌구석까지... 무지랭이 백성들에게까지 전파한다는 좋은 의도는 있었소... 그러나 이건 좋은 의도보다 영 이뭐병 스럽게 흘러갔소. 나중에 서원하고 더블로 결탁해서는 아주 조선중후기 사상과 발전을 잘도 말아 쳐먹었소.
양반들이 향약이다 서원이다 뭐다 하면서 지방에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중앙집권화는 약해질 수 밖에 없었소. 16~17세기 전반으로 세계의 이슈는 중앙집권화와 중상주의였건만... 조선에선 역으로 지방분권화와 농업중시가 이뤄지고 있었소...
이것이 후대로 내려가면 서원을 중심으로 아주 폐악한 상황으로 벌어지게 되고, 아무리 탐관오리라지만 지방관을 감히 거적에 싸서 동구 밖에 내다 버리고, 양반네들이 민란을 주도하는 사태로 까지 변하게 되오. 뭐 어떻게 좋게 보려면 좋게 볼 수 있지만, 저런 짓은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으로 미친듯이 변화하는 세계정세에서 별로 도움도 못 됐소.
PS. 정도전은 왕권에 대립할 세력을 신권으로 보고 왕이 찌질해도 신하들이 잘하면 나라가 잘 굴러갈 거라 생각했소. 허나 정도전은 신권이 찌질하게 될 가능성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고, 이방원은 왕권중심의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 정도전을 치게 되었소. 그러나 이후 조선은 후기까지 쭉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 주요하게 일어났소. 이 과정에서 죽어나는 건 백성들 뿐이었는데... 아마 프랑스 삼부회 식으로 왕권과 신권 중간에 민권이 끼어들 여지가 있었다면 어느 정도 벨런스가 맞게 되었을 지도 모르겠소.(물론 그랬다간 19세기 조선에서 아마 프랑스처럼 왕 모가지가 날아가는 사태가 벌어졌을 지도...--;;;)
PS2. 하여간 조광조로 부터 시작한 사림파 코드인사 체제는 조선을 정말 휑하게 말아 먹는 다오... 산에서 글만 읽던 작자들이 실제 정치나 나라 살림에는 깜깜할 수 밖에 없는 터... 무엇 보다 이 인간들이 숭배의 영역으로 승화한 사대주의와 부국강병에 대한 개념없음은 후손들의 일빠화와 찌질화에 큰 공헌을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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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씨 역갤에 '오작선생'님이 올린 글입니다.
인물과 사상 3월호에 김상웅 독립기념관장이 쓴 <훈구세력의 '조광조 죽이기'>라는 글이 있습니다.
조광조를 개혁가로 높이 평가한 글인데 반론을 쓰고 싶으나 능력이 딸리므로 이 글을 가져왔습니다.
강직한 성품은 인정할만 하지만 현실감각은 제로인데다가 임금을 계속 괴롭혔죠.
유학자로는 어떠한 지 모르겠으나 정치가나 개혁가로는 빵점이었습니다.
# by | 2007/03/06 17:07 | 스크랩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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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광조에 대한 한 마디
부단뽀이님의 글을 트랙백함. [펌]...조선을 말아먹은 최강 찌질리안 조광조...부단뽀이님이 직접 쓰신 글은 아니고 디씨에 올려져 있던 글을 퍼 오신 모양이다. 내가 봤을 때는 여러모로 수정보완이 필요해 보이는 글이다. 그래서 몇 자 적기로 한다. 여말선초... 두 개의 세력이 있었소... 한쪽은 이성계와 정도전이 주축이 된 '시바 다 엎어'파였고, 한쪽은 최영과 정몽주가 주축이 된 '닥치고 전통'파였소... 다들 아시다 시피 최영은 이성계 회......more
... 부단뽀이님의 글을 트랙백함. [펌]...조선을 말아먹은 최강 찌질리안 조광조...부단뽀이님이 직접 쓰신 글은 아니고 디씨에 올려져 있던 글을 퍼 오신 모양이다. 내가 봤을 때는 여러모로 수정보완이 필요해 보이는 글이다. 그래서 ... more